Rogue Pictures Presents THE UNBORN In Theaters January 9th

ENGLISH VERSION [Part 1] [Part 2]
[Korean Version / 원본] PDF (좀 더 읽기 쉬운...)
TWITCH- 제가 보기에는
<전설의 고향>
의 귀환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파에서 공포/납량특집의 컴백입니다. 그간 케이블에서 소위 퓨전공포 시리즈가 등장한 바는 있었지만, 공포에 관한 진정한 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기보다 그냥 공포의 옷을 빌린 (혹은 벗긴) 에로물에 좀 더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레드백>
이나
<도시괴담>
등등 드라마시티에서 가끔 공포가 나타난 경우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두번째
<전설의 고향>
이 90년대 후반에 막을 내렸을 때는 공포가 점점 지상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범수씨가 출연한
<고死>
를 제외하면 충무로에서도 여름 공포 시즌이 거의 사라졌다고 하면 과언이 아닐겁니다. 그래서 동시에 시청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포멧이면서도 신선한 시도라 할 수 있어요.
근데 또 하나는 단막극의 유산이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느껴지는 거죠. 제작진 리스트를 살펴보면 피디님을 비롯해서 이정섭 피디님, 이민홍 피디님, 김정민 피디님, 김용수 피디님 등등 다 드라마시티 출신이고, 8부작 단막극 포멧도 그렇고. 드라마시티가 폐지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이 류의 “대안”이라면 전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피디님은
<전설의 고향>
이 공포의 컴백이라는 의미를 너머에 좀 더 경쟁력이 강한 드라마시티에 대한 “대안”이 될 가능서이 있고, 미래의 비슷한 포멧으로 이루어질 드라마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까?
곽정환 PD-
<전설의 고향>
(이하
<전고>
)은
<드라마시티>
(이하
<시티>
) 폐지 전,
<시티>
여름 특집으로 기획, 진행됐고,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시티>
폐지 결정 후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납량 특집’으로 최종 결정됐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멜로’와 ‘홈’ 드라마, ‘미니시리즈’와 ‘연속극’만이 살아남은 - 90년대 초반까지는 분명히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드라마들이 공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현재 한국 드라마계에
<시티>
로 대표되는 ‘단막극’ 포맷은 -물론 상당한 비중을 ‘멜로’가 차지하기 했지만- 장르물을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시티>
’ 이전에 또한 유일하게 ‘공포/스릴러’ 장르의 명맥을 잇던 것이
<전고>
였지요. 이러한 이유들이
<전고>
를
<시티>
와 자연스럽게 연결 짓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전고>
에 캐스팅된 배우들이
<시티>
의 부활을 언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수목 미니시리즈 라인업에
<전고>
가 편성된 이상
<전고>
의 위상은
<시티>
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역으로 사고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번
<전고>
가 시청률과 광고 판매에서 다른 미니시리즈와 비교해 손색없는 ‘실적’을 낸다고 가정하면, KBS가
<전고>
를 향후 계속하여 시도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성공한”
<전고>
가 -멜로를 포함한
<시티>
의 다양한 장르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어도- 한국 드라마계의 유일한 ‘장르물’, ‘단막극’의 명맥을 이을 대안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의 ‘장르물’, ‘단막극’ 포맷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실패한”
<전고>
는 다시 한 번
<시티>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용될 것이며, 한국에서 ‘장르물’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TWITCH- 가을 개편을 통해서 KBS가 단막극을 부활시킬 예정입니다, 포멧이 복귀할 방식과 편성이 어떨지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폐지 소식이 처음 나왔을 때 시청자의 강한 반대 운동에다가 드라마계도 그 싸움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메가진T 인터뷰에서 피디님께서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이슈를 찍었죠: 하나는 방송사가 드라마를 오직 돈 버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문제였고, 또 하나는 사실상 방송사가
<시티>
에 대처한 대안이 없었다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단막극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과 함께 그 판단에 좀 기묘한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꼭
<시티>
브랜드를 다시 일으켜 부활시키는 것보다
<시티>
의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폐지가 됐을 때 난리가 났지만, 다시 시작하면 5%로 다소의 드라마 마니아를 제외하면 대부분 시청자와 기자의 외면을 당하고, 계속 폐지의 악몽과 싸우는 소외된 포멧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KBS가 포멧을 부활시키는 이유는
<시티>
의 가치와 장단점을 이해하고 좀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예를 들어서,
<전고>
같은 시도) 단막극을 다시 출발시키는 마음이었나요, 뭣보다 엄청난 시청자와 드라마인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민심을 읽고 문제를 해결하는” 판단이었나요? 현 시국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말입니다. ^^
곽정환 PD- KBS가 밝혀 온 입장은 ‘단막극의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해결할 대안이 있다면 ‘단막극’을 부활시키겠다는 것이며, 한가지 실행 방안으로 예전보다 제작비가 대폭 하향 조정된 “저예산 단막극’이라면 가을에라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밝힌 것입니다. 드라마팀 PD들은 ‘단막극’을 속히 부활시켜야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 KBS 재정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부활을 주장할 상황은 아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예산” ‘단막극’ 부활을 가을 개편에 받아들여 ‘적자 구조’를 해결하고 ‘단막극’의 정신을 계승하는 두 가지 목적에 모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실패”한다면 다시 폐지되거나 혹은 부활 자체가 무의미해 질 수 있다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따라서 현재 드라마팀 PD들은 가을 개편 “저예산”
<시티>
부활을 놓고 많은 논쟁을 벌이며 신중하게 검토중이며,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TWITCH- 예전에
<시티>
가 제일 좋아하시는 드라마라고 말씀하셨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은 작품이 있나요?
곽정환 PD-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는 -어느 특정 드라마가 아니라-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스스로 작업할 수 있고, 또 자극받을 수 있는
<시티>
라고 여겼습니다.
<황금숲, 토끼>
(김용수 연출)의 독창적인 실험,
<아나그램>
(김규태 연출)의 장르적 완성도,
<제주도 푸른밤>
(김규태 연출)의 지독한 감수성,
<변신>
(김영조 연출)의 난해한 철학,
(김원석 연출)의 컴퓨터그래픽 모두가 드라마 연출자인 저의 교재이자 스승입니다.
TWITCH-
<시티>
의 가장 중요한 점은 굳이 신선함이나 다양성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변신>
,
<저수지>
,
<제주도 푸른밤>
, 저런 류의 훌륭한 작품은 거의
<시티>
에서만 볼 수 있지만, 그보다 지난 4-5년간
<시티>
가 여러 작가와 피디에게 준 간접적인 영향이 컸죠. 단막극이 준 여유가 열어준 감각이랄까... 드라마의 전형적인 재료를 피하는 내러티브 접근이라든가, 비주얼 스토리텔링이나 장르적 뉘앙스 등등. 마치 드라마의 전통적인 레시피와 정반대인 평행선이 살아 있는 듯이 중요한 공간이었죠. 사람마다 나름이지만, 대하드라마를 제외해서 지난 몇년간 KBS 최고의 드라마를 살펴보면
<시티>
출신이 가득찬 “축제”처럼 느끼는데 말입니다.
<부활>
,
<마왕>
을 통해 박찬홍 피디님과 김지우 작가님께서 보여준 마법 같은 콤비, 함영훈 피디님과 박연선 작가님의
<얼렁뚱땅 흥신소>
, 노희경 작가님의
<굿바이 솔로>
와
<꽃보다 아름다워>
, 그리고 물론
<한성별곡-正>
. 교양국으로 시작하셨지만 사실상
<시티>
가 키운 피디로서 자기 전체적인 스타일과 작품에 이 포멧이 준 영향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곽정환 PD- 방송사의 모든 드라마 PD와 작가는 사실 ‘단막극’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막극’이야말로 드라마의 ‘R&D’ 포맷이라고 저는 봅니다. ‘R&D’는 미래 발전 가능성의 척도입니다. 현재 유행하는 정형화된 ‘멜로’와 ‘홈’ 드라마 역시,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드라마를 휩쓸었던 ‘트렌디 멜로’처럼 언젠가 퇴조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 퇴조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단막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멜로’와 ‘홈’ 드라마가 퇴조한 이후의 대안을 마련할 자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대안’으로 기능하는 드라마 장르와 포맷은 모두 ‘단막극’을 통한 ‘R&D’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막극’이 없다면 그 ‘대안’은 ‘미드’나 ‘일드’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한때 일본 방송 녹화 테잎을 보며 ‘포맷 베끼기’에 몰두했던 수치스러운 기억처럼 말입니다.
연출 데뷔, 작가 데뷔를 꿈꾸고 준비하는 과정이란 ‘단막극’ 포맷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상상하는 과정입니다. 만약, 연출과 작가가 작품에 어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분명 단막극 포맷으로 스스로를 훈련시켜 온 결과물일 것입니다.
<한성별곡-正>
에서 제가 연출로서 남다른 “스타일”을 이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남다르게 돋보인” 특징적인 사극 연출의 일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머릿속으로 그려온 무수히 많은
<시티>
와 실제로 방송된 두 편의
<시티>
를 통해 “남다르게” 표현하고자 고민하고 훈련해 온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남다르게” 표현하고자 하는 고민이 없다면 “창의적인” 드라마는 탄생할 수 없습니다.
TWITCH—사극의 본질을 되찾고 그 매력을 남다르게 표현한 것은
<한성별곡-正>
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극 마니아라도
<대장금>
과
<주몽>
이 대박나서 3사가 그런 성격의 사극으로 승부하다는 것은 그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항이 아닙니다 (어차피 아무리 문화라 해도 이것도 산업이기도 하니까). 근데 요새 거의 모든 사극이 그 길만을 따라간다는 점, 낮은 시청률이 나올까봐 점점
<한성별곡-正>
과 같은 신선한 작품이 나오기 어려운 판국이 된 점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돈>
,
<정조암살미스터리-8일>
과
<한성별곡-正>
은 지난 2년간 정말 사극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되찾고 아주 기가막히게 장르의 열기를 보여줬지만, 아직도 방송사가 그런 작품에서 특별한 영향을 받았다는 신호가 별로 안 보이고, 제작진에게 소수의 팬이 보여준 열정을 제외하면 방송사가 그런 마인드로 사극을 제작하는 인재를 “보상”하는 분위기도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상황이 다를 수 있겠지만.
<최강칠우>
와 같은 의미있는 실험을 보여주고 난 뒤 KBS가 동시에
<주몽>
표 사극의 우려와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는
<바람의 나라>
나
<천추태후>
와 같은 대하드라마를 준비하는 바람에 현 사극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곽정환 PD-
<한성별곡-正>
은 기존 사극을 모태로 탄생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천추태후>
와 같이 ‘장기 편성을 전제로 하는 대하 사극’이나,
<바람의 나라>
와 같이 ‘시청률 경쟁을 목표로 하는 (20부-36부 내외) 중장편 사극’과는 근본적으로 출신 성분이 다른 것이죠.
<주몽>
,
<이산 정조>
의 성공 사례처럼, 한국의 방송사들에서 ‘사극’은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으로, 트렌디 멜로의 자리를 대신하여 ‘흥행하는 드라마’의 대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시청률과 광고 판매를 보장하는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사극’을 중요시하는 것이지, ‘역사의식’, ‘사관’, ‘주제의식’의 가치 면에서 ‘사극’을 선호하는 것이 아닌 듯 보입니다.
바로 그 ‘사극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인식’의 지점에서, 한국 사극을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이라는 장르로 구분하기 모호해지는 이유가 발생합니다. 더 이상 ‘사극’에서 ‘정통사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역사적 팩트나 사관, 나아가 국가관이나 인간관 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현재 엄밀히 따지자면 ‘정통사극’이라고 할 사극이 존재하지 않는 듯도 보입니다. 비극적이지만 앞으로도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인 시청률로 광고를 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KBS의
<바람의 나라>
,
<천추태후>
는 현재 한국의 ‘사극’으로서 가장 적당한 포지션을 갖는 사극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일주일에 두 편의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 제작관행에서 어쩌면 질적으로 완성도 높은 ‘정통사극’ 대본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에서 두 편으로, 편성시간이 50분에서 70분으로 늘어난 양적인 측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존 텍스트를 바탕으로 팩트 중심으로 진행하던 과거 ‘정통사극’과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의 문제-예를 들어, 대본 한 편에 담기는 정보량의 문제, 시청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진 문제 등-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앞으로 모든 ‘사극’이 ‘퓨전’이 될 것이라고 저는 예측합니다.
‘정통’을 거슬러서라도, ‘퓨전’으로써라도 이루어야 하는 ‘사극’의 미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통’을 지키지 못할 바에야 ‘정통’을 비켜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성별곡-正>
은 ‘퓨전사극’이지만, ‘정통’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입니다.
<한성별곡-正>
은 ‘사극’으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주제의식’을 구현하기 위해 사극을 선택한 경우입니다.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다보니 첫 출발점보다 점점 ‘정통’에 가까워지게 된 것이지요.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시대와는 다른 ‘그 시대’의 묘사가 중요했고, ‘퓨전’에서는 오히려 자유로운 ‘고증’에 오히려 충실하게 된 것입니다.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오히려 ‘그 시대’를 경시하는 ‘정통사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셈입니다. (예를 들어,
<한성별곡-正>
에서 ‘도끼 장면’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팩트를 현재와 연결짓는 고리로 이용한 것이지만,
<일지매>
의 ‘촛불 장면’은 현재의 효선이 미선이 사건을 사극에 이용한 것으로, 이런 접근방법의 차이가
<한성별곡-正>
은 ‘퓨전’이지만 ‘정통’에 가깝고,
<일지매>
는 ‘정통’을 주장하지만 ‘퓨전’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극에서 소재로서 ‘인물’과 ‘시대’를 선택하는 순간, 이미 ‘인간관’과 ‘역사관’은 개입됩니다. ‘인물’과 ‘시대’에 얼마나 충실하느냐는 일반적인 ‘사극의 완성도’ 문제와는 별개로,
<한성별곡-正>
이 갖는 독특한 매력은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인물이 살다간 그 시대’를 중요시했다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그 시대’에 필요한 ‘인물들’을 배치하여, ‘인물이 살다간 그 시대’를 묘사하는 방식은, 기존 사극처럼 ‘역사 속의 인물’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얻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사극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무시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극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 연연하지 않은 것이지요. (기존 정통사극을 오래 연출하신 선배께 불려가
<한성별곡-正>
연출의 문제점에 대한 훈계를 참 많이 들었지요. ^^;;)
시청률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8부작 등 ‘짧은’ 미니시리즈 -한국에서는 ‘미니시리즈’란 개념이 외국의 ‘mini series’와 다르게 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성이 꺼려지는 현실인데다, 초기 제작비가 많이 투입되는 사극을 ‘짧게’ 편성하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듯합니다. 문화산업적 측면의 이러한 문제가 향후 계속될 때, 앞으로 ‘사극의 문제’는 ‘정통사극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보다 ‘퓨전사극의 미덕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에 있다고 봅니다.
TWITCH- 피디님의 경력을 보면 배우나 작가와의 인연을 매우 소중히 하시는 편인 듯 싶어요. 박진우 작가님과는 물론 같이
<그들의 진실>
도 하셨고, 중간에 무산됐던 작품도 있었으며, 둘이 이런 저런 작품 하다가 다시 한번
<한성별곡-正>
에서 만나셨죠. 근데
<참빗>
을 보니 주인공인 박수현씨만 아니고, 그땐 본명인 김현진으로 활동했던 김하은 양도 인상이 깊은 10초 카메오로 나왔습니다. 박수현씨로 따지면 공동연출하셨던
<이 죽일놈의 사랑>
도 같이 하셨는데, 다시 한번
<구미호>
에서 같이 일할 하은양과 함께 곽피디님의 페로스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준익 감독님처럼 촬영하시는 스타일이 뭔지, 일하는 분위기가 뭔지 잘 아는 배우와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상황인가요?
곽정환 PD- 배우나 작가 뿐 아니라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배우나 작가의 경우, “나를 잘 알아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측면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을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출이 스탭에 대해, 배우에 대해, 작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그 “시너지”를 발휘하도록 요구할 수 있고, 그 결과 긍정적인 “조화로움”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연출과 스탭과 배우와 작가가 “조화로움을 이룬 드라마”라야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드라마”라고 또한 믿습니다. 그래야 그 “좋은 드라마”를 통해 연출과 스탭과 배우와 작가와 시청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겐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이란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드라마”에 대한 제 믿음입니다.
TWITCH—생각해보니
<한성별곡-正>
에는 A부터 Z까지 다 어떤 “파격적인” 요소가 있었죠, 스탭들부터 캐스팅까지 다 사극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점부터. 장현성씨나 김영애씨, 배성우씨, 한정수씨 같은 선택도 신선했고, 안내상씨의 무서운 연기를 비롯해서 주인공들이 다 놀라운 캐스팅이었으며, 따지고 보면 정진씨의 짧은 카메오도 개성이 엄청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스타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너무나 산업화된 드라마계 앞에서 장사꾼이 아닌 진정한 드라마인의 배짱이 지배한 캐스팅처럼 느꼈어요. 그래서 좀 아이러니였죠, 어떤 면에서 사극의 패턴화된 “세계”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가 오히려 사극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는 것. 일부러 패턴을 깨고 잠자던 사자를 다시 한번 세울 겸 저런 류의 캐스팅 정신에 집중하셨나요? 아니면 그것을 특별히 의지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하자, 한번이라도 겁없이 드라마가 필요한 배우만 뽑고 나가자, 그런 마음으로 캐스팅하셨나요?
곽정환 PD- 연출자가 사극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 연연하지 않으니, 스탭과 연기자 캐스팅에 있어서도 사극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지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존 사극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 또 한 가지 이유는
<한성별곡-正>
이 ‘8부작 미니시리즈 사극’이라는 태생적 특징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획 단계부터 시청률 경쟁과는 무관한 ‘짧은 사극’으로 출발하면서 애초부터 스타시스템과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타성을 무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주제의식’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인물’을 부각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을 그리는 이야기이므로, ‘주제의식’을 위해서 ‘인물’이 다소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 연출자로서 생각이었습니다. ‘인물들’이 조화롭게 모여 ‘그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어쩌면 오히려 ‘스타 캐스팅’은 ‘혼자 튀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조연출할 때 연출 의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연기만을 고집하는 ‘스타’ 연기자나, 연기자 감정이나 스케줄을 앞세워 팀웤을 저해하는 ‘스타’ 연기자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혼자 튀는’ 캐스팅을 많이 경계하는 편이지요. ^^;;)
TWITCH—퓨전사극의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 선택은 캐릭터의 이름이었습니다. 원래 퓨전사극이야말로 역사의 본질인 “과거와 현재간의 대화”란 개념을 보여줘야 하는데, 역사속 인물에 집착하면 그럴만한 자유가 없을 겁니다, 그 인물에 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근데 갑자기 정조가 “임금”이 되고, 정순왕후가 그냥 “대비”가 된다면 그 선택은 여러 가지 기회를 열어줍니다. 일단
<한성별곡-正>
처럼 고증에 충실하고 사료를 잘 해석해도 현재와의 어떤 관계를 마음대로 (비교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모든 캐릭터가 가상인물이었다는 점은 동시에 그들이 부분적으로 표방한 역사속 모델의 뉘앙스를 드러내면서 현재에 있을 듯한 지도자 (혹은 그 자를 포위하는 인간들)의 모습도 보여줬는데, 박작가님과 함께 스토리를 구성하면서 실존인물의 정체를 벗긴 그 캐릭터 이름을 통해 이 류의 과거와 현재간의 듀얼리즘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곽정환 PD- 말씀드렸듯이
<한성별곡-正>
은 ‘역사 속 인물’을 그리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그 시대’ 속에 필요한 ‘인물들’을 배치한 이야기입니다.
<한성별곡-正>
의 ‘주제의식’이란 ‘현재의 우리들’이 ‘그 시대를 살다간 인물’을 통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역사 속 실존 인물’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현재의 우리들’입니다. 모든 등장 인물들은 ‘현재의 우리들’을 묘사하기 위해 배치된 것입니다. 다만 ‘사극’이기 때문에 최대한 ‘역사 속 인물’과 근접하게 조각하려 노력했습니다만, ‘현재의 우리들’과 크게 관계없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제시켰습니다. 그래서 대본의 ‘정조’와 ‘정순왕후’를 ‘임금’과 ‘대비’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그래서 박작가님도 동의했고, 그래서 ‘정조는 중요하지 않다’고 언급했던 것이고, 그래서 정약용과 같은 정조시대의 주요인물이 등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극’ 연출로서 저는 두 가지를 중요시합니다. ‘드라마로서 재미있는 이야기일 것’과 ‘역사적으로 현재의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퓨전사극’에 대한 제 신념은 이렇습니다. ‘정통 사극은 그 시대 그 인물을 정교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미덕을 지닌다. 하지만 퓨전 사극의 미덕은 역사 속에서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통해 현재를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데에 있다!’ (가끔 저는 고민합니다. ‘역사 속의 현대성’을 찾아내는 ‘사극’ 연출의 시각과 ‘현대극 사회물’ 연출로서 ‘사극’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무엇인지... ^^;;)
TWITCH—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하면 그 너무나 유명한 “막 가자는 게로구나” 사건을 언급할 수 밖에 없죠. 고맙게도 감독판 DVD에서 장면이 다 나왔다는 건 매우 반가웠지만, 사실 기자들의 반응 그 자체가 좀 오버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노무현 전대통령의 발언과 닮은 그 말은 그냥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고, 그 장면이 없어도 비유가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니까. 악플이나 분위기를 따져보니 대충 “감히 정조대왕을 노무현하고 비교하다니”와 같은 톤이었지만, 제가 보기에 드라마는 굳이 정조와 노무현의 업적을 비교하자는 마음보다 그들의 개혁과 정치가 실패했다는 이유를 상징적으로 비교하자는 거죠. 저런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지지세력이 없었다는 정조가 사라진 뒤 조선이 세도 정치의 막장에 빠진 듯이 노무현 정권도 비슷한 한계가 있었고, 비슷한 방식으로 통치의 막을 내렸고... 음. 나머지는 역사다! 이렇게 덜 민망하게 비유를 끝냅시다. ^^ 2007년에 마치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날에 맞춰서 나온 듯이 주로 샐러드 드레싱으로 묘사됐던 정조가 사극 세 편의 주인공이 된 것은 참 엄청난 아이러니였는데,
<한성별곡-正>
을 통해 원래 저런 뉘앙스를 드러내고 싶었나요, 아니면 좀 더 전체적으로 실패한 개혁자에 관한 철학과 메시지였나요?
곽정환 PD-
<한성별곡-正>
의 ‘주제의식’은 ‘진보’와 ‘보수’라는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람’이 갖는 ‘한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에 큰 의미를 지니며, 역사적으로 정조의 개혁정치시대를 통해 현재를 돌이켜보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한성별곡-正>
에 대한 해석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좀 더 확장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역사를 ‘작용과 반작용’으로 보든, ‘정-반-합’으로 보든 관계없이, ‘진보’과 ‘보수’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노무현 정권과 정조 후기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신념’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색채’를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며, ‘한계를 가진 사람들’로 인해 ‘진보’와 ‘보수’의 경계선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며, ‘불확실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신념’이 왜 중요한지 그 이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한성별곡-正>
을 실패한 개혁자의 이야기만으로 보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연출로서 연출의도와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쓰라린 자책감이 많이 남습니다. ‘시청률’에 대한 아쉬움은 ‘흥행’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주제의식’에 대한 아쉬움이지요~ ^^;;)
TWITCH- 과거에도 정조를 맡은 배우가 많았지만, 안내상씨의 정조가 역대 최고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냥 사료에 쓰여 있는 사건을 통해 이어진 정조의 이미지가 아니고, 정말 왕관을 벗을 때의 이산이란 인간이 가진 한계와 서러움을 완벽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그의 존엄과 함께 느껴진 외로움은 조선이 사실상 사대부의 나라였다는 개념을 드러내고, 왕위에 앉아도, 이론적으로 천하제일이라도 그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엄청난 한도 보여주었죠. 참으로 눈물날 만큼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안내상씨는 주로 사극을 자주 하시는 편도 아닌데, 굉장히 좋은 배우였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일이었으나, 사실 저도 충격 좀 먹었어요.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 곤룡포를 입어서 환생하는 느낌이랄까요. 피디님도 이 정도가 될 줄 처음부터 예상해서 안내상씨를 캐스팅했나요?
곽정환 PD- 임금 역을 캐스팅할 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임금’의 고뇌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실학사상이 급격히 유포되어 사회적으로 부의 재분배와 신분계급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고,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던 ‘그 시대’, 백성과 사대부의 권력 관계에 관한 ‘임금’의 고뇌는 다른 ‘임금’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처음부터 안내상씨를 임금 역으로 생각한 이유는 바로 1980년대 초반 이후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누구보다 뼈저리게 고민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안내상씨만큼 ‘그 시대’ ‘임금’의 고뇌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믿었지요.
드라마시티 ‘아나그램’에서부터 안내상씨 연기력에 대한 확신은 갖고 있었는데,
<한성별곡-正>
안내상씨가 발군의 연기력을 보였다면 그것이 제가 고려한 그 이유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본인도 확신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연기력은 타고난 재능보다 그 사람의 신념과 노력을 모두 아우르는 사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 촬영 당시엔 제가 주문했던 디테일에 비해 연기가 조금 모자라다고 여겨 안타까워했지요. 지나고 보니 크게 표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연출의 욕심은 끝이 없어라...)
TWITCH—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캐릭터가 개성이 강하지만, 주인공을 떠나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박인빈과 월향이었죠. 도지원씨는 몇 번 사극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 대충 낯이 익은 배우였지만, 참 매력적이고 여러 가지 뉘앙스가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주셨죠. 월향은 아마 사극 사상 최초의 제대로된 기녀랄까 (
<임꺽정>
에서 송채환씨가 맡은 소흥도 매력적이지만).... 원래 사극에서 여성 캐릭터는 늘 proxy로, 대리권력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데 (조선일수록 심한 일이고), 월향에는 그런 점도 보이지만 주로 “여인천하스러운” 이미지보다 권력의 맛과 법칙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본 사람의 날카로운 통찰력도 보입니다. 그래서 상규 앞에서는 사랑에 빠진 인간이 보이고, 심민구 앞에서는 “미친년처럼 달구경이나 다니렵니다”고 할만큼 배짱이 대단한 “선수”가 보이며, 예인의 뉘앙스도 느껴지고 여러 가지 가면도 보이는 케이스였죠. 마지막에 그가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는 이미지는 특별히 강했죠. 마치 조용히 시국의 흐름 속에서 선수답게 움직이는 인물이지만, 결국 속으로 뭔가를 바꾸고자 하는 소망으로 사는 인간처럼 느꼈죠. 역시 이것도 正과 인간의 다양한 소망이란 주제의식의 또 다른 이면이었나요?
곽정환 PD- 월향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린 이미지는 20세기 한국 현대 정치사의 밀실정치와 함께 빈번히 등장하는 비밀요정의 마담(?) 이미지입니다. 세도가들과의 잦은 접촉으로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알지만 꼭 필요한 때 외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 ‘현명한 요부’이지요^^. ‘제국의 아침’ 조연출 당시부터 도지원씨의 외적 이미지와 내적 연기력을 오랫동안 알고 있던 터라, 캐스팅할 때 계산한 대로 정확하게 ‘월향’이 구현됐습니다. 좀 더 품위 있게, 좀 더 강인하게 연기의 폭을 넓히도록 주문하는 연출의도에 도지원씨가 완벽하게 잘 따라주었지요. (캐스팅은 역시 나를 잘 아는 것보다 내가 잘 아는 편이 낫다니까요.^^)
월향은 ‘진보’와 ‘보수’ 양쪽을 잘 알면서도, 태생적으로 어느 한 쪽에도 속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요. 자신을 ‘중도’라고 굳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캐릭터입니다. 판을 전체적으로 노련하게 꿰뚫어 보는 ‘심민구’와 엮어 놓은 이유 역시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입장은 같지만,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대비시키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월향이 아무리 ‘중도’를 유지하려고 해도 결국 판세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알고 있지만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또 그 때문에 살아남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월향’입니다. 역사는 침묵하고 살아남은 다수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니까요.
TWITCH—박인빈. 참 미치도록 매력적인 캐릭터죠. 원래 신돈이나 임꺽정 같은 anti-hero도 매력적이지만, 박인빈이 특별히 매력이 있었다는 이유는 그가 이론적으로 악역이라도 그의 말이 다 일리가 있는 거였죠. 첫회에서 전임이판 앞에 했던 말, 자꾸 아들 앞에서 까칠하게 던진 이슈; 이건 미워도 탓할 수 없는 인물이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악역이 될 수 없는 자죠,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 정하연 선생의 사극에서도 시청자가 그 엄청난 정당화를 통해 “반대편”의 신념을 이해하게 되지만, 주인공만큼 “악역”이 매력이 있다는 건 특히 사극에서 보기 드문 일이죠. 결국 정조의 개혁을 망쳐버린 벽파라도 그 사람도 누구의 아비이자 지아비이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실수를 하며 투쟁하는 인간이라는 건 정확한 선악의 구분을 원하는 대중에게 못 마땅한 캐릭터였겠지만, 사극만 아니고 모든 드라마가 필요한 캐릭터에 관한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연산군을 이해하려는
<장녹수>
같은 작품도 있었고, 폐비윤씨나 신돈과 같은 재해석도 있었지만 그건 극적 발전이라기보다 사극계의 전체적인 사관이 좋아졌다는 의미인데,
<태양의 여자>
같은 멜로도 선과 악의 경계선을 없애기 시작했다는 바람에, 악역이 아닌 그냥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란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이 점점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곽정환 PD- 박인빈 캐릭터가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 부모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수구 보수라고 불리는 그들도 유신 정권에 맞서 4.19를 일으켰던 세대이며, 변절했다고 매도당하는 이들도 80년대 광주항쟁에 이어 민주화 혁명을 이끌었던 세대들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와 맞서며 새로운 기성세대가 되어갑니다. 그 과정에 보수화된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서는 새로운 세대를 지켜보게 됩니다. 박인빈의 논리는 한국사회 기성세대의 변하지 않는 논리입니다. 어떠한 악행을 저지른다 해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모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논리이지요.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친일파들을 청산할 방법은 없습니다.
암울한 악순환의 고리일 수도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보수의 순환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박인빈 캐릭터를 강조한 이유는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일 뿐, 악인이 아님’을 보여주고 공감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악인이 아니라,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일 뿐임’을 늘 강변하는 기성세대에 새로운 세대가 과연 공감하고 용서할 것인지를 묻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판단은 오로지 새로운 세대의 몫인 것이지요. 허허허...^^;;
TWITCH—세 젊은 주인공은 다 우리의 현실과 잘 통하는 인물이지만, 특히 이 시국에 양만오 같은 캐릭터는 특별히 빛나는 편이죠. 현실에 부딪힐때마다 그의 미망은 중요한 경험이 되고, 속으로 커지는 그의 간절한 소망은 점점 현실에 제대로 부딪힐 힘이 되며, 걸어가면서 성숙해지는 캐릭터죠. 그래서 전 마지막 부분에 무슨 통속극이었듯이 “평생의 나의 사랑이 떠나갔으니 20년 동안 서럽고 비참한 외로움을 견뎌서 눈물이 비추는 길을 걸어갈거다”는 깊은 슬픔이 아니고, 자기 안의 어떤 소망을 일으킨 촉매가 사라졌으니, 평생 내게 준 그 촉매의 의미를 소중히 하면서 다른 소망을 일으킬 그 뭔가를 찾고자 계속 살것이다”는 뉘앙스가 느껴죠. 그런 의미해서, 두 캐릭터가 자기 소망대로 세상을 떠나고, 또 다른 두 캐릭터가 소망의 실패로 살아남았고 또 다른 소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에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마치 주제의식의 원자폭탄이 내 앞에 폭발한 듯이 엄청나게 강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류의 뉘앙스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느낄 수 있고, 드라마를 전체적인 흐름으로 승부하는 “비주얼 문학”으로 취급하는 시청자가 돼야 이 같은 작품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나, 요새 드라마를 재미만을 추구하는 오락프로의 부산물로 취급하는 시청자가 많아서 아쉽게도 5%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드라마가 됐죠. 시청률 경쟁에서는 패배였지만, 피디님께서 그 5%의 머릿속에서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을 의미심장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합니다”란 꼬리표를 표방하면서 원하는 결과였고, 그 5%가 이 드라마에 대해서 아직도 가진 열정을 보니 피디님을 만족시킬만한 결과라고 생각합니까?
곽정환 PD-
<한성별곡-正>
이 방영될 당시나 이미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시청자들의 관심이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현상을 볼 때 연출자로서는 매우 만족스럽게 느낍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결과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결과입니다. 방영할 때 소위 ‘대박 치고’ 금새 잊혀지는 것보다 훨씬 만족스럽다고 여깁니다. 문화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 속에서
<한성별곡-正>
은 어찌 보면 사생아처럼 태어난 작품입니다.^^ 이는 자기비하적인 자학이 아니라 ‘영화계의 이단아!’ 같은 촌스럽지만 강력한 필이 느껴지는 문구처럼^^ 마치 상업주의적인 세태에 맞선다는 의미가 느껴진다는 측면에서 제게는 꽤 만족스러운 표현입니다. ‘한국 드라마계의 이단아!
<한성별곡-正>
’ ㅋㅋㅋ
‘이단아’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걸 보면 저는 스스로를 아직 ‘기성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라고 여기나 봅니다. ^^
<한성별곡-正>
의 ‘주제의식’이 그러하듯, 어쩌면 전 ‘한국 드라마계의 이단아’로서 현실에서 ‘기성세대의 드라마’에 반발하고 ‘새로운 세대의 드라마’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서 그러하듯, ‘기성세대의 드라마’와 싸워가는 동안 저도 언젠가 ‘기성세대’가 되어 ‘기성세대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저에게 누군가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세대의 드라마’를 들이밀며 반발하겠지요.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 한 번 소망해 보는 게지요.... ^^
TWITCH—
<구미호>
로 시작한
<전고>
가 첫회부터 화제를 일으켰고, 시청률도 현 시국으로 따지면 대박과 다름이 없는 20.1%로 출발했습니다. 요새 월화 드라마의 경쟁을 살펴보면, 어떤 드라마가 한번 (닐슨통계를 지배하는) 시청자를 땡기면 끝까지 퀄리티를 떠나서 그를 고정 시청자로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산>
과
<밤이면 밤마다>
로 간 괴도기를 살펴보면 그게 굳이 어떤 “타성 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한 동안 수목 경쟁을 지배했던
<태양의 여자>
가 6%부터 출발해서 27%로 끝난 덕으로
<구미호>
도 좀 더 “편안한” 출발을 하긴 했지만, 이것은 그냥 전작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숫자가 아닙니다. 이 반가운 출발은 어떻게 설명하면 됩니까... 전작의 영향, 자체제작만이 “허락하는” 제대로된 홍보의 덕, 아니면
<전고>
란 브랜드에 관한 시청자의 기대였을까요?
곽정환 PD-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 ^^; 제가 의도한 것에 대해서라면 정확하게 설명 드리겠지만, 시청률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라... 흠... ) 자체제작이기 때문에 홍보 면에서 더 유리한 점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대신, 이번
<전고>
에 대한 기대감을 상승시켰다고 추측되는 요인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8편의 에피소드들을 한데 묶어 홍보하면서 발생한 시너지 효과입니다. 특히 캐스팅 관련해서 처음에 ‘최수종’씨, 다음 ‘이덕화’씨, 다음 ‘박민영’씨 등으로 약 한 달여에 걸쳐 8편의 캐스팅 관련 홍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점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전고>
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에피소드 8편이 각각 지니는 이야기의 ‘신선함’을 부각시킨 점이 주효했다고 봅니다. 옛
<전고>
에 대한 ‘향수’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도 크지 않았을까요? ^^
(결과적으로 ‘향수’를 자극해 시청 전 ‘기대감’을 높였지만 그래서 시청 후 ‘실망감’ 또한 커진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ㅠㅠ. 개인적으로는 최종적인 시청률 수치가 ‘절대 평가’로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청률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가 상대 프로그램과의 ‘대진운’이며, 시청률 수치는 동시간대 프로그램간의 ‘상대 평가’로서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상대 프로그램이 드라마였느냐, 올림픽 인기 종목이었느냐가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싶습니다.)
TWITCH- 나이로 따지면 명옥이 최연소 구미호인 것도 새롭지만, 아마 최초로 요괴의 상징을 넘어서 그야말로 “인간화된” 최초의 구미호가 됐습니다, 그냥 자기 정체를 숨기는 무서운 가해자에서 억울한 피해자로 변하는 것도 굉장히 새롭고. 역시
<한성별곡-正>
에서 기존 사극과 달리 한계가 가득한 캐릭터로 승부했을 때처럼 굳이
<구미호>
같은 유명한 소재로 간 이유는 다시 한번 장르의 규칙과 전형을 깨는 매력 때문이었나요?
곽정환 PD- 먼저 소재로서
<구미호>
를 선택한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야겠네요.
<구미호>
를 결정하고 추진하던 선배께서 라인업에서 빠지게 되어 제가 이어받은 아이템입니다.
<전고>
에서
<구미호>
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교체하면 안 된다는 전제가 있었지요. 소재의 문제를 떠나서 저는 전통적인
<전고>
내러티브 구조를 깨고 싶었습니다. 전형적인 인물과 귀신, 단선적인 플롯, 익숙한 사건과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지요. ‘향수’를 기대한 시청자들이 그래서 더 실망했겠지만요. ㅠㅠ.
<구미호>
의 전형성을 재현하는 것도 전략일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구미호>
의 전형성을 깨고
<구미호>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한성별곡-正>
에서도 그랬고, 전 기존 관습과 전형을 깨고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작업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익숙한 캐릭터와 캐스팅, 익숙한 이야기가 갖는 후광효과를 누리기보다 낯선 캐릭터와 신선한 캐스팅, 새로운 스토리를 통해 창의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요. ^^.
<구미호>
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스토리 측면, 이미지 측면에서 역발상을 시도했지요.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새로운 스토리를 짜는 문제였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구미호’가 아니라 ‘구미호에게 한을 품게 만든 사람들’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예전
<구미호>
에서 ‘구미호’와 사람 사이에 낳은 아기의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발전시켜, ‘구미호의 피’와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레드 콤플렉스’를 연결시키고, ‘구미호에 대한 공포감’을 ‘공포감을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결시키게 됐습니다. ^^ 스토리를 새롭게 짜다 보니 가장 큰 고민은
<한성별곡-正>
의 고민과 마찬가지로 시청자들이 이야기를 잘 따라올 수 있겠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초중반부에는 시청자들이 익숙한 호러와 스릴러 장르의 관습과 규칙을 오히려 최대한 따르는 전략을 취했죠. (그래서 인홍과 인홍모의 역할과 분량이 커졌어요. 분당 시청률을 분석해 보면 이 전략은 상당히 잘 먹혔습니다. 일정 간격을 두고 끊임없이 ‘전통 귀신’을 등장시켜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키면서 동시에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TWITCH—역대 구미호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아주 무서운 명단이죠, 한혜숙부터 장미희, 김미숙, 박상아, 송윤아와 김지영까지. 어색한 점이 아직도 많았지만,
<구미호>
를 보니 박민영 양은 사극과도 꽤 잘 어울리더라구요, 귀여운 연기 외에는 드라마틱 연기도 정말 좋아졌고.
<한성별곡-正>
이 발군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이번에도 김하은양의 반가운 캐스팅을 떠나서 민영 양과 김태호씨, 이연두 양도 아주 인상이 깊은 연기를 했죠. 이건 좀 뻔한 질문일지도 모르는데, 피디님께서 자꾸 이렇게 가능성이 큰 젊은 배우를 발견하시는 것은 좀 더 운이 좋은 상황인가요, 아니면 늘 드라마의 성격에 맞춰서 움직이는 그 제대로된 캐스팅으로 이루어진 성과이라고 생각해요?
곽정환 PD- 캐스팅을 할 때 일군의 후보들을 적어놓고 캐릭터 각각의 후보들끼리 조합을 떠올리며 그들의 ‘조화로움’을 상상합니다. 오랫동안 상상하다가 확신이 드는 후보를 확정짓습니다. 신인이더라도 캐릭터와 잘 어울리게 만들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어정쩡한 기성 연기자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 서로를 살려주도록 연기자를 배치하면 캐릭터가 돋보이게 된다고 믿습니다. 물론 캐릭터와 어울리는지, 서로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서는제가 연출자로서 연기자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죠? ^^
TWITCH—드라마에 관한 비난을 좀 살펴보니, “무섭지 않았다”는 이야기 좀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특별히 이
<구미호>
를 탓하는 불만이라기보다,
<전고>
의 유산이 만든 불만일 수도 있죠. 사람은
<전고>
만 들으면 무슨 내장적 (visceral) 유쾌감과 노골적인 공포감을 기대하니, 갑자기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철학을 느끼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들”의 행동이 간섭적으로 귀엽고 억울한 명옥의 변화를 일으키는 캐릭터에 관한 드라마를 보니 단순한 납량특집을 기대하는 사람은 좀 황당했을 거죠. 전 오히려 그것이
<구미호>
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1970/1990년대
<전고>
에 대한 대중의 그 기대, 그 작품의 유산은 뭣보다 영향이었나요, 그냥 부담스러운 압박이었나요?
곽정환 PD-
<구미호>
가 까다로운 소재라는 것은 PD들 모두 동의했었지요. 예전처럼 만들면 ‘식상하다’고 욕먹고, 새롭게 만들면 ‘이게 뭐냐?’고 욕먹을 수 있다고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 새롭게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저에겐 예전
<전고>
에 대한,
<구미호>
에 대한 대중의 기대, ‘향수’는 엄청난 부담이었죠. 하지만 압박이 큰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긴장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단순한 납량물, 공포물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 파시즘, 레드 콤플렉스 등에 관한 정치적 상징과 은유를
<구미호>
에 담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서부터는
<구미호>
에 몰입해 열정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똘이 장군’ 만화를 통해 ‘빨간 돼지’에 대해 갖게 된 고정관념을 깨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던 저에게, 예전
<구미호>
에 대해 시청자들이 갖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업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이 이견 없이 갖게 된
<구미호>
에 대한 공통된 고정관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아주 오래전
<구미호>
를 처음 연출한 누군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
<구미호>
가 어떻게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억을 지배해 온 것일까요? 그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작용 아닐까요? (애초부터 내러티브 구조에서부터 소재에 대한 시각까지 예전
<구미호>
에서 완전히 비껴난 지점에서 출발했으니 그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예전
<구미호>
개념을 해체시켜 버렸다고 볼 수 있겠죠. 역시 ‘향수’를 기대한 시청자들이 원성은 커질 수 밖에요. ㅠㅠ. )
TWITCH—권선징악이 없다는 불만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전작과 달리 선과 악을 명백히 구분하는 드라마인데, 인홍의 아비나 맨 마지막에 효문의 “선택”을 보면서 박상규와 박인빈이 생각났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가 저지른 짓을 앞에서 망설이는 상규의 모습은 결국 이씨 가문의 엄청난 압박 앞에서 종손이자 “선수”가 된 효문도 시기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고 한계가 많은 캐릭터입니다, 결국 효문의 선택은 다르지만.
<한성별곡-正>
에서처럼 정치적 및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선택과 희망을 지배하고 바꿀 수 있다는 그 뉘앙스를 다시 한번 느끼면서 피디님의 작품에서는 권선징악이라기보다 남귤북지 (南橘北枳)를 기대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라 깨달았습니다. 토종 공포와 같은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장르에서도 그런 까다로운 사회비판이 나타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구미호와 도깨비, 저승사자 중에서라도. ^^
곽정환 PD- 스토리를 새롭게 짠 가장 큰 이유는 권선징악 류의 ‘단선적 플롯’에서 벗어나, ‘주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제 관심은 ‘토종 공포’나 ‘공포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갖는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오락적 기능’뿐만 아니라 미디어 콘텐츠로서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제 ‘소망’ 때문이지요. 만약 도깨비나 저승사자 이야기를 해야 하더라도 저는 ‘주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는 스토리를 짜고 사회성과 정치성을 담아내려고 시도할 듯합니다. ^^ ‘주제의식’을 위해 캐릭터가 설계되다 보니, ‘박상규’와 ‘효문’의 캐릭터가 유사성을 띱니다. 사실
<구미호>
와
<한성별곡-正>
의 엔딩 씨퀀스는 같은 기능을 합니다.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다만 ‘효문’의 모습은 ‘박상규’가 아닌 ‘양만오+월향’의 모습입니다. 제가 의도한 복잡미묘한 ‘효문’의 표정은, 좌절하여 체념한 ‘양만오’와 후대를 기약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 ‘월향’의 모습을 뒤섞은 느낌입니다. ‘효문’의 미묘한 표정이 완전히 체제에 순응했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순응한 체하지만 강렬한 불만을 가진 모습 양쪽 모두 해석 가능하게 비춰지길 원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시청자들이 의문을 품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TWITCH—처음으로 여우 털과 같은 분장이나 가면, 가발 대신에 그대로 나오는 구미호죠. CG를 볼 때 어색한 점도 있었고, 꽤 잘 어울리는 점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것보다 강하게 느껴진 점은 제작발표회에서 피디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섹시함... 아니 섹시함이라기보다 여성성? 명옥은 귀여운 면도 있고, 슬픈 면도 있으며, 우아하면서 살짝만 무서운, 아주 쿨한 구미호였는데, 명옥이 구미호가 된 이후 마치 한 순간에 어린 처녀의 순진함을 잃어버리고 확 성숙해졌던 팜므 파탈의 뉘앙스도 있었죠. CG를 떠나서 이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제일 신경 쓰셨던 점이 뭔가요?
곽정환 PD-
<구미호>
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스토리와 함께 외형적인 이미지도 역발상을 했습니다. ‘초경’ 설정에 따라 나이가 어린 ‘변신 전 명옥’은 귀엽고 발랄하며 호기심 넘치는 소녀의 이미지가 되는 건 당연합니다. 문제는 ‘변신 후 구미호’였습니다. 의상, 분장, 미용 등 미술적 이미지는 드라마 전체의 미술 컨셉과 통일성을 이루도록 스타일리쉬한 모던함을 추구한 것입니다. 미술팀 회의도 여러 차례 가지며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죠. CG를 활용한 ‘아홉 개의 꼬리’는 새로운
<구미호>
이미지의 포인트로, 모양, 위치, 굵기, 색깔, 움직임 등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했습니다. 특수영상팀에게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쩌면 세계 최초로 시도한 이미지 작업일 수도 있겠습니다. ^^. 그리고 분노, 복수의 감정 표현을 위해 등과 뺨에 활성화되는 문신을 CG로 추가했습니다. CG가 어색하다거나, ‘구미호’가 무섭지 않다거나, ‘꼬리’가 탐스럽다는 등 욕도 많이 먹었지만 저는 최선을 다한 만큼 결과적으로 꽤 만족스럽답니다. ^^
‘변신 후 구미호’는 ‘변신 전 명옥’과 대비되는 ‘성숙미’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초경’이나 ‘성년식’, ‘구미호 피의 발현’은 우리가 성숙하여 사회에 대해 눈을 뜰 때를 상징한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추고 비로소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성숙미’가 ‘섹시함’으로 둔갑됐지요. ㅠㅠ.) 드라마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피날레의 비주얼 임팩트보다 ‘변신 전 명옥’이 서서히 ‘종중’의 실체, ‘구미호’ 공포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신경 썼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점차 ‘비판적 시각’으로 성숙해야만 ‘구미호’로의 변신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고, 그 결정적 계기가 되는 ‘억울한 서옥의 죽음’에 ‘분노’하기 위해서는 ‘명옥’과 ‘서옥’이 서로 동일시할 만큼 두 자매 사이에 확실한 유대감이 형성되어야 했습니다. 명옥의 캐릭터만큼 서옥의 캐릭터를 중요시해야 했던 중요한 이유입니다.
TWITCH- 또 다른 반가운 “손님”은 고증과 시대 정신이었죠, 소품부터 아묵리가 (亞墨利加) 같은 디테일까지. 예전
<전고>
를 보면 임충이나 정하연, 이환경 선생님과 같은 베테랑의 에피소드에서도 공포의 장르적 요소를 떠나서 사극으로서 꽤 짜임새가 강한 배경이 느껴졌는데, 그 다른 편은 그냥 토종 공포의 클리셰로 버티고 여기저기 어색한 CG와 효과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미호>
를 보니 이건 2부작이었다면 아마 할 얘기를 좀 더 잘하고 끝까지 다 묘사할 시간이 있었겠지만, 설정부터 주제의식까지 나무랄데가 없는 대본이죠. 하미선과 김재은 작가님은 처음 듣는 분들인 듯 싶은데, 이것이 만약 입봉작이라면 참으로 기대되는 작가들이네요. 그들의 전작이나
<구미호>
의 대본을 맡게 된 과정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곽정환 PD- 여러 작가들이
<구미호>
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스토리를 만들었고, 대본 작업에 적합한 신인 김재은 작가를 초이스했습니다. 김재은 작가는 ‘에이전트 제로’라는 케이블 드라마를 준비했던 경력만 있는 신인인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작업 과정 중에 선배로부터 SBS ‘남과 여’와 KBS ‘사랑과 전쟁’, ‘봄의 왈츠’ 등을 집필하신 하미선 작가를 추천받았고, 두 작가의 장점을 상호 보완해가며 수정고까지 프로듀싱을 하고, 디테일을 추가해 대본을 완성시켰습니다. 신인작가와 작업을 할 때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틀에 갖혀 연출의 요구를 채 수용하지 못하는 기성작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TWITCH—자, 이 무섭게 긴 얘기의 마침표! ^^ 입봉작으로 걸작인
<한성별곡-正>
을 남기셨고, 많은 피디와 작가에게 어려운 과도기인 두번째 작품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셨죠. 이젠 피디님도 나름 흥행감독이신데, 다음 작품을 좀 더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아니면 계속 같은 스타일로 갈 생각인가요? 그리고 특별히 하고싶은 장르나 소재, 같이 일하고픈 작가가 있나요?
곽정환 PD- 여러차례 밝힌 대로 앞으로도 가능하면 오락적 기능과 함께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주제의식’이 담긴 드라마를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시도를 계속 해 볼 생각입니다. 역시 기존의 관습과 전형을 깨고 창의적이고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한 시도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물론 KBS 내부 사정에 따라, 드라마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하거나, 새로운 장르물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극을 또 하게 되면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유명 기성작가와 작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인 작가들과 전문직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도 계속 구상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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